[경북여행]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방산 허훈의 흔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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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방산 허훈의 흔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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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외지에 나서면 문득 인근의 유명한 명소를 들리고 싶어진다. 경북도청의 배후 주거지 예천군 호명면 일대 클린 환경행정 조성 상황을 살펴보고 짬을 내 인근 병산서원을 다시 찾아갔다. 

병산서원 만대루 (사진/ⓒ전병택)

한국고전번역원 고전 포럼 <사상사 연구의 방향성에 관한 성찰>에 따르면 
한 학자의 일생에서 초학과 만학은 다르다 학문을 시작하는 시기가 초학이라면 학문을 완성하는 단계가 만학이다. 초학과 만학의 시기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아호의 출현이 한가지 준거점이 될 수 있다. 

명종대 예안의 산중에서 비로소 '퇴계'로 거듭난 이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중종대의 이황은 퇴계 이전의 퇴계였다.

순조대 강진의 유배지에서 비로소 '다산'으로 거듭난 정약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정조대의 정약용은 다산 이전의 다산이었다. 퇴계 이전의 퇴계, 다산 이전의 다산은 만학의 전형성에 가려진 초학의 신세계이다. 

여기 경상도 구미 임은 출신의 유학자 허훈(1836~1907)이 있다. 이황-정구-허목-이익-안정복-황덕길-허전의 학통을 계승하는 인물로 그 문하에서 장지연이 배출되었다. 

그는 말년에 도산서원의 동주(洞主)와 병산서원의 원장(院長)을 지내며 퇴계학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기실 그가 초년에 몰입했던 학문은 조선시대 육경고학의 주창자인 허목의 고학이었다. 

[동주洞主=원장 院長], 방산 허훈의 제자 위암 장지연은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써서 을사늑약의 굴욕을 폭로했다.

낙동강변 언덕길을 돌고 돌아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비포장 도로, 요즈음에는 거의 보기 힘든 비포장 도로다. 문경 봉암사 산사 들어가는 길도 이와같이 비포장 옛길이라 그나마 먼 과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고 서애가 타게하자 1613년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 류성룡 선생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징비록이다. 서애가 영의정과 도제찰사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임란 당시의 기록을 16권 7책으로 남긴 것이 징비록이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산서원을 다시 찾은 이유는 한말 병산서원의 원장의 소임을 맡았다는 구미 출신 방산 허훈 의병장의 자취를 찾아보는 목적에서였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백일홍 붉은 꽃잎이 연못에 떨어지면 더할 수 없는 풍경이 펼처진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만대루 일 것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위 동재 : 아래 서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묘지기, 장무, 정지지기들이 거주하였고, 향사제 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도의 건물을 고직사(庫直舍)라고 한다.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사청에서 바라보이는 입교당 뒷 마당의 여유로운 공간을 한컷 담았다.

장판각이다.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입교당 뒷문에서 바라보이는 만대루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맏형인 류운룡(柳雲龍)이 1564년(명종 19)에 지은 겸암정사 위치는 하회마을 북쪽 화천(花川)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芙蓉臺)의 서쪽에 있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을 맡을 정도로 영남유림의 종장이었던 방산 허훈 선생이 겸암정사에 대한 시를 남겼다.

前臨潭壁後穹林   앞에는 맑은 강물 뒤에는 푸른 숲,
粧占各區適淺深   높낮이 알맞게 정자 터 잡았구려.
鹿洞煙雲餘異馥   녹동의 끼친 향기 변함없이 남아 있고,
龍門弦誦有遺音   용문의 글소리 아직도 들리는 듯하네.
松風塵落疑天雷   시원한 솔바람 천뢰가 부는 듯,
江月澄鮮證道心   강물 속 맑은 달은 도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네.
滾滾昏塵如脫却   어지러운 세상 티끌 잊을 수 있어,
杖鞋勝日此來尋   지팡이 끌고 날씨가려 경치 좋은 여기에 찾아왔네.
구미 출신 의병장 방산 허훈(許薰: 1836~1907)의 겸암정사 시 

[※ 두락(斗落) = 마지기 (1마지기는 200평) 3천 두락은 약 60만평 정도 된다.]

한말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대통령 비서실장)등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관직을 버리고 위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1만여명의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일제와 맞서 싸운 왕산 허위 선생과 그 가문의 정신을 기려 만든 왕산루는 만대루 보다 더 크게 지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구미 시민과 구미시 당국의 행정 비협조로 독립운동 가문을 기리는 기념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는 상태다.

방산 허훈 왕산 허위 가계도 (그래픽/황채민)

도산서원, 병산서원 원장을 지낸 영남 유림의 종장 방산 허훈 선생의 가문은 3대에 걸처 14인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이다.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방문한다면 두 서원의 원장을 지낸 한말 의병장 방산 허훈 선생을 떠 올리면 더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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