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용 구미시장 조부, 적우(赤宇) 장홍상(張弘相)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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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슈

장세용 구미시장 조부, 적우(赤宇) 장홍상(張弘相) 1탄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성한 구미시 산동면 물빛공원 내 '왕산광장'과 '왕산루'의 명칭이 신임 구미시장이 취임한 이후 '산동광장'과 '산동루'로 변경된 것에 대해 "원래 명칭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왕산 허위 선생의 장손자 허경성 부부 주장하는 1인 시위 후 장세용 구미시장이 왕산 허위 선생의 장손자 허경성 부부와 9월 20일 면담을 하는 이 과정에서 장 시장은 "우리 할배(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해도 산소도 없다. 이만큼 신경 써 해준다고 했는데…"라며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 하는 일이 있었다. 

구미 출신 왕산 허위 선생은 을사늑약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1908년 체포돼 사형당했다. 안창호·안중근 의사 등과 같은 독립유공자 서훈 1등급이다. 왕산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4명을 배출해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서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안동)과 함께 독립운동 3대 명문가로 꼽힌다.

이토록 왕산 허위 선생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독립운동가인데도 고향인 구미에서 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산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후 구미에 남아있는 허씨 가문 전체가 만주로 망명가서 독립운동을 이어갔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구미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키르키스스탄 미국 등지로 뿔뿔히 흩어져 있다.

구미에는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받는 독립운동가 57명이 된다. 허훈, 허위, 허겸, 허학, 허필등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을 포함해서 장진홍 의사, 박희광 의사, 김정묵, 송병우등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있다.

장시장이 우리 할배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산소도 없다고 한 발언을 반추하며 장시장의 조부 적우 장홍상 선생에 대한 기록을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등을 찾아 보았다.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장홍상등 20인 판결문이 있었고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는 적우 장홍상(張弘相)은 나이 29세 때 (1930.11.05) 경성지방법원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기록에는 42세 때인 1942.02.23 일제에 의해 또 다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6월형을 받는다. 

두가지 판결문의 본적이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 OOO 번지로 동일하고 주소는 대구에서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으로 바뀐다, 또한 이름도 장홍상(弘相)에서 궁장홍상(弘相)으로 바뀐걸로 보아 창씨개명으로 한것으로 보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도 弘相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19271210일 경북 대구부 남산정 437번지 백대윤(白大潤) 집에 모인 이봉재(李鳳在), 윤장혁(尹章赫) 등 수 명은 당시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책임자 赤宇 장홍상(張弘相)을 초빙하여 수강한 후 막스주의에 동조하여 사유재산제도의 부인 및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신우동맹(新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였다. 1929년 양산 남부리 출신 이봉재 외 23명이 체포되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적우동맹과 당수 장적우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해 놓았다.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는 현재의 경북고등학교 전신이다.

1928년 2월 26일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를 중심으로 대구농업학교와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모여 조직하였다.
본래는 신우동맹(新友同盟)이라 하여 1927년 11월 15일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창립되었다가 그 해 12월 27일 혁우동맹(革友同盟)으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28년 2월 26일 적우동맹으로 개편되었다가 그 해 4월 30일 일우동맹(一友同盟)으로 개편, 발전되었다.
창립회원은 장적우(張赤宇)·윤장혁(尹章赫)·장종환(張鍾煥)·정수광(鄭壽光)·문철수(文鐵洙)·손익기(孫益基)·권태호(權泰鎬)·김낙형(金洛衡)·백대윤(白大潤)·조은석(趙銀石)·상무상(尙戊祥)·이월봉(李月峰)·정복흥(鄭復興)·이봉재(李鳳在)·박득룡(朴得龍)·장원수(張元壽)·김봉구(金鳳九)·장은석(張銀石)·한상훈(韓相勳)·황보선(皇甫善)·이기대(李起大) 등 20여 명에 달한다.

당주(堂主)는 장적우, 책임비서에 윤장혁이 선임되었으며, 회원을 2개 그룹으로 분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중앙조직으로는 비서·재무(재정)·선전·조직·정치·문화·조사·출판부의 8개 부서를 설치, 운영하였다. 조직 목적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데 있었다.

당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대소유융(大沼惟隆)이 심리 판결 주문한 내용 중 일부다.

피고 윤장혁 등 여러 명은 소화 2(1927) 2월 이후 공산주의자 박광세(朴光世), 장적우(張赤宇)일명 장홍상(張弘相) 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강의를 듣고 공산주의에 공명함과 동시에 조선독립을 희망하여 현재의 사유재산제도를 파괴하고 공산제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함으로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하여1. 피고 윤장혁, 상술상, 조은석, 이봉재, 박득룡, 백대윤, 김낙형은 소화 21210일 다른 여러 명과 함께 경상북도(慶尙北道) 대구부(大邱府) 남산정 437번지 피고 백대윤의 집에 모여 당시 평양형무소를 출감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상북도 책임자 장적우 일명 장홍상을 불러 단체조직의 희망을 말하자 동인은 예전과 같이 무정견(無定見)으로 모이는 것보다 조직적 통일적으로 단결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실지에 응용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할 것을 제의하자 피고들 일동은 이에 찬성하고 즉시 동소(同所)에서 협의하여 조선 내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제도를 실현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신우동맹(新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강령으로,

1. 우리들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의 함양을 목적으로 한다.

2. 우리들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을 한다.라고 정했다. 

PV_MS_0001_1930.10.25.0033_1-1.PDF

제4차공산당사건  治安維持法違反罪 공판 안내 매일신보사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장홍상

대구시 동구 망우당공원 내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1895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50년간 대구·경북 항일독립유공 국가 서훈자 1천796위자를 명각해 봉안하고 있다.

장홍상과 함께 적우동맹의 창립회원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은 받은 사람은 애국지사 황보선 (皇甫善) (애족장), 조은석(趙銀石) (애족장), 박득룡(朴得龍) (애족장), 장원수(張元壽) (애족장)등 4명으로 확인되었다.

해방 직전 <1945년 8월 7일 심산 김창숙 선생이 건국동맹 관련으로 성주에서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같은 날 관련자들이 조금씩 시차가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운파 최관호도 이 날 해평에서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같이 수감된 사람들은 박관영, 장적우(張), 장하명(張何鳴), 문상직(文相直, 1892~), 정세호 등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장세용 시장의 할아버지 적우 장홍상도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관련 일제판결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적우동맹,신우동맹, 혈우동맹등 일제강점기 당시의 학생운동 기록을 보면 학생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것으로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이 재학하는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는 조선교육령시기에는 4년제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반도 전체에 24개교의 관ㆍ사립 고등보통학교와 1만명 내외의 고등보통학생이 있었다. 이는 0.045%의 취학률로 당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치에 해당했다. 그래서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의 집안과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시대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사상에 받아들인 시대적 배경도 같이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