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확장단지 왕산 허위 선생 기념 왕산광장 왕산루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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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슈

구미 확장단지 왕산 허위 선생 기념 왕산광장 왕산루 명칭

경북 구미 임은동 출신 왕산(旺山) 허위(許蔿.대한민국장)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포문을 연 의병전쟁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일병합(1910)이 되기도 전 부터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반판사,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국무총리)급의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워왔으며 고종에게 을사오적(乙巳五賊)등 친일파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나라를 구하려고 온 몸을 던진 분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매국노 이완용의 체포령에 의해 피체되어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일찌감치 항일전선에 나선 인물이다.

건국훈장은 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 그리고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이 있다. 대한민국장은 중국인 5명을 제외하면 25명이 서훈받았다. 경북에는 구미 왕산 허위, 문경 운강 이강년, 성주의 심산 김창숙 3명이다.


왕산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와 후손, 왕산가 외손인 이육사 형제, 사위 이기영 3형제, 직계제자인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를 비롯 가문 전체와 제자까지도 항일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하였다.



방산 허훈 (애국장) 

왕산 허위의 맏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000 마지기 (약 60만평) 땅을 팔아 의병 창의 군자금으로 내놨고 자신도 직접 진보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안동 영양 영덕 청송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 직을 맡기도 했다.



성산 허겸 (애국장)


셋째형 허겸은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나섰으며 허위의 사촌인 범산 허형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허겸은 허위의 순국 후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구미 임은동의 허씨 일가를 모두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에서 허혁등의 이름으로 부민단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석주 이상룡과 함께 교민들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허겸은 1922년 7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부하 30여 명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출옥한 후에도 86세의 나이로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40년 90세를 일기로 주하현(현 상지시) 하동에서 서거하였다.


(참고 - 주하현(현 상지시) 하동은 허형식 장군이 활동한 지역이기도하다. 성산 허겸선생의 친필간찰 성산만필이 있다고 한다.)


범산 허형 -


범산 허형은 왕산 허위의 12살 많은 사촌형이다. 범산은 을사오적 중 군부대신 이근택의 처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범산 허형은 사촌동생 허위 의병대장의 순국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랑하는 큰 아들 허민도 잃고 72세의 나이로 성산 허겸을 따라 1915년 음력 3월 임은허씨 일가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길에 나섰다.


허형의 장자 허민은 고종의 명으로 창경궁 명정전과 명정문의 현판을 쓸 정도로 명필이었다. 일제의 독살에 의해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말이 허은의 책에 나온다. 


허형의 딸이 바로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며 범산은 이육사 형제의 외 할아버지가 된다.


범산가에는 임청각의 3대 종부 허은 여사만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 그 이유는 통일되기전에는 서훈신청도 하지 말라는 유언때문이다. 

시산 허필 (건국포장)

허필 애국지사는 한말 의병대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사촌 동생으로 허위가 순국한 뒤, 그의 형 성산(性山) 허겸(許兼) 및 그 일족인 범산(凡山) 허형(許蘅) 등과 함께 1915년 경 만주로 이주하였다.

 

1922년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동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허필은 일경(日警)의 신문(訊問)에 단 한마디도 자백하지 않고 감금된 그날부터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는 단식(斷食)을 결행하였다. 라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이 같은 공훈을 기려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했지만 그동안 후손을 찾지 못해 전수가 이뤄지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이 사실을 알고 10년만에 손자인 허창수씨에게 전달되도록했다.


시산 허필은 한학과 의학에 조예가 있어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어 일가를 부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특히 허필의 둘째아들 허형식은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항련 총참모장을 맡았으며 중국정부에서는 항일영웅열사 300인에 그 이름을 올려 국가적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허학 (애국장)


허학은 왕산의 장남으로 부친 허위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할 때 21살의 약관으로 참여하였다.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부친의 순국 후 숙부 허겸과 같이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일송 김동삼등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했으며 나중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허학은 1925년 신민부(新民府)가 창립되자 원로들로 구성된 참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34년 허학은 일제 관헌의 비밀문서인 『국외에 있어서 용의조선인명부』에 ‘남만주군정서원(南滿洲軍政署員)’으로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왕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우 허영과 허준, 그리고 허국도 같은 혐의로 수배 대상으로 만주로 망명한 후에도 끊임없이 일본군경에 쫏기는 신세였다. 


일경에 쫏기던 1940년 9월 28일 허학은 카자흐스탄에서 서거하였다.


 

허영 (광복군)


허위의 둘째아들 허영도 만주로 망명 후 광복군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허위의 장손인 허경성씨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 허경성(93)옹의 부친 허영은 흑룡강성 영안현 산시에서 김좌진 장군과 같은집에서 살았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허경성(1927년생)과 그의 동생들(순성,도성)도 부친이 김좌진 장군과 같은 집에서 살 때 영안현 산시에서 태어났다. 해방후 도문시를 거처 두만강을 건너 귀국하였으며 그 당시 소련군의 진군으로 급히 귀국하느라 부친 허영과 생이별을 하게되고 소식이 끊기게 된다.


허준 (광복군)

특히 허위의 3남 허준은 만주로 망명 후 영안현 해림진 산시역 앞에 있는 백야 김좌진과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허준의 아들 허광배 허웅배 허환배의 이름을 김좌진 장군이 직접 지어주었다. '배달나라의 영웅이 되고 빛이되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허준은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총무부장 또는 경리부장을 맡으면서 백서농장을 관리할 때 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을 때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허국 (광복군)


왕산의 4남 허국은 만주로 망명 후 다시 러시아로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키르키스스탄 까지 유랑의 삶을 살았다. 허국의 아들이 허게오르기와 허블라디슬라브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키르키스스탄 방문시 이들을 만나 "허위 선생 같은 분들의 희생이 계셨길래 그나마 해방을 맞고 이만큼이나 살게 됐는데 그런분들의 후손은 제대로 모시고 있지 못해서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중산 허종 (독립운동가)


중산() 허종(鍾)은 허훈의 장자인 허숙의 아들이다. 허종은 종조부 허겸과 같이 신민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구에서 활동하였다. 


허종은 1920년 9월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에 가입하여 서로군정서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2년 12월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은 대구시장을 역임한 허흡(許洽)이며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 허소 수석 행정관이 허흡의 손자다.


일창 허발


일창 허발은 범산의 둘째 아들로 만주에서 일창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군의 연락처로 제공하고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다. 


허발은 이육사의 큰 외삼촌으로 독립군자금을 모아 준 고마움으로 이육사가 '수부선행' 친필 휘호를 외삼촌에게 써 보내기도 했다.


일헌 허규


범산의 셋째 아들인 허규는 종숙 허위가 창의하자 격려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1운동 때에도 6개월 간 고초를 겪었다. 


1925년 허규는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도만하였다. 히 김규식(金奎植)·김구(金九)·안재홍(安在鴻)·여운형(呂運亨)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92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루고 가석방되었다. 


그 후 비밀결사 사건으로 서울 왕십리에서 다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내종질 이원기·이원록(이육사)·이원일 등은 독립운동 의 동지였다. 


1935년 이후 허규는 전후 3차의 시국사범으로 복역하였다. 일헌 허규는 광복단 사건에 관계돼 옥고를 치른 후 광복을 맞아 귀국. 입법위원이 됐다.


왕산의 3남 허준이 서울에서 체포되었을 때 친일부호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을 찾아가 "이 사람이 누군줄 아느냐? 바로 왕산의 3남 허준이다!" 라고 한마디 호통을 치자 장택상이 깜짝 놀라 풀어줬다는 일화가 있다.


허은 (애족장)


임청각 종부, 독립군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허은 여사는 바로 일창 허발의 딸이다. 왕산 순국 후 1915년 임은 허씨 집안이 만주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 8살 이었다. 


만주로 간 후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손자 이병화 독립투사와 혼인하여 안동 임청각 집안과 구미 왕산가는 겹사돈이 되었다. 


허은 여사가 구술한 내용을 엮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책에는 구미 임은동 이야기에서 부터 만주로 망명가는 길 그리고 이육사의 어머니인 고모 허길, 큰 아버지 허민, 고종 사촌 이육사, 작은 아버지 허규 그리고 나이 어린 아저씨 허형식 장군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허형식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항일연군 총참모장)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광야'에 등장하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에 ‘초인’은 실제 만주에서 백마를 타고 무장 항일투쟁을 벌였던 허형식(許亨植) 장군이라고 경북독립운동기념관측이 밝히기도 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허형식 장군은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백마 타고 다녔으며 허형식 장군의 외손녀 심송화는 백마타고 사라진 허형식 할아버지라는 시도 남겼다.



중국방송에서 소개하는 허형식 장군


중국 정부는 1998년 허형식 장군 전사지에 순란지 표지석과 희생지 비를 세우고 영렬원 (영웅열사공원)도 만들었고, 2014년 국가급 항일전쟁 유적지와 함께 발표한 '항일영웅 열사' 300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구미 확장단지 10호 공원에 설치되기로 한 왕산 허위 가문의 14명의 독립운동가 동상이 갈곳을 잃은 상태다.(사진/수자원공사)



키르기스스탄을 공식방문한 이낙연 총리가 18일 왕산 허위(1855~1908)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만났다.
허위 선생은 1908년 의병투쟁을 하다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애국지사다

허위 선생의 후손들은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조국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총리는 유공자 후손 초청 환담에 이어 동포간담회에서도 독립유공자 이야기를 하다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왕산의 4남 허국의 아들들을 만났다.

구미 확장단지 10호 공원에 건립된 전통누각, 왕산 허위선생을 기려 만들어진 누각으로 처음 왕산루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은 태생지 위주로 해야한다는 논리 하나로 산동면 동네 이름을 딴 산동루로 바뀌게 되었다.(사진/ 장호철)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국무총리)급의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관직을 버리고 13도 연합 의병 창의군을 결성해 일제와 맞서 독립전쟁의 포문을 연 허위의 가문은 의병과 독립군 활동에 온 집안이 나서 희생했다. 


그 결과 가문은 풍비박살이 났으며 구미에는 왕산 허위 가문의 후손들이 전혀없으며 남은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이국땅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국이 허위에게 보답한 것이라고는 해방 뒤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로 명명하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 뒤늦게 왕산가의 독립운동사를 기려 왕산루와 왕산광장을 만들고 14명의 기념동상을 세우려고 추진되었으나 '구미 산동면 지역정서와 맞지않다'는 이유 하나로 왕산루는 산동루로 왕산광장은 산동광장으로 그 이름마져 뺐기고 14명의 독립운동가 동상은 갈곳을 잃고 창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구미 #지역정서 구미 출신 3대 항일가문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는 일이 지역정서와 맞지않다? 도대체 구미 지역 정서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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