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 구미출신 독립투사 유적지 만주답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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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 구미출신 독립투사 유적지 만주답사 기행

중국정부에서 항일영웅열사 300인에 공식 발표할 정도로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3군장)의 유적지를 찾고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는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한 <2019년 8/1~7, 6박7일> 만주답사 기행은 동북 3성의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의 주요 도시와 백두산을 거치는 <하얼빈시-경안시-상지시-목단강시-도문시-연길시-용정-백두산-통화시-심양시>등으로이어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얼빈에서 동북열사기념관과 동북항일연군 박물관을 찾아 잊혀졌던 영웅 허형식 장군의 자취를 찾은 후 하얼빈에서 100km 떨어져 있는 쑤이화시(绥化市)로 이동해 둘째날의 여정의 숙소를 찾았다.

하얼빈시<인구 약 1,060만명>도심에 있는 중국은행 건물. 하얼빈 시내 중앙대로의 이름을 조상지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상지대가(尚志大街)로 이름 붙였다.(사진/전병택)


허형식 장군 77 주기 추모식을 쓴 글을 읽고 이어서 이 글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 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추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고향 선산 쌀과 고국의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차리고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경안현 시내 인민공원에 있는 허형식 장군 기념비를 방문한 후 하얼빈 동남쪽으로 130킬로 떨어진 상지시(尚志市)로 향했다. 

쑤이화시(绥化市)에서 대라진 허형식 장군 희생지 까지 50km 왕복과 다시 하얼빈을 거처 상지시로 이동했으니 대략 430 km를 이동한 셈이다.


하얼빈에서 상지시(尚志市)로 가는 G10 고속도로 거리는 130km 정도다.

하얼빈에서 상지시를 거처 목단강까지 연결되는 고속철도 노선이 지나간다.

상지시로 들어가기전 오길밀까지는 31km, 목단강 까지 21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있다.(사진/전병택)

상지시로 나가는 출구 표시판

상지시(尚志市)는 흑룡강성 에 위치한 인구 70만의 도시로 1946년 항일투쟁 영웅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조상지(趙尙志)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옛 주하현을 1989년 상지시로 승격시킨 항일의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다.

상지시(尚志市) 도심 중앙 로터리에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경북 구미 출신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이 이곳 옛 주하현에서 딸을 얻었다고해서 딸 이름을 하주로 지었다.  (사진/전병택)

상지시에서는 상지시 조선민족사 책을 편찬에 주필로 참가한 한득수 선생을 만나 상지시에 대한 조선민족사에 대해 듣게되는 시간을 가졌다.

상지춘천국제주점 (尚志 春天国际酒店)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상지시 조선민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윤정우)

상지시의 조선족 총인구는 2만419명으로 상지시 총인구의 2.4%를 차지한다. (2009년) 상지시에서 조선인들의 자취는 1900년 초 이상설, 김좌진, 이청천, 김규식, 정신, 김동삼등 독립운동가들이 발자취가 어려있으며 삼고류는 1933년 10월 허형식 장군이 지원한 주하항일유격대 창설지이다.

9.18 만주사변(일본의 만주 침략) 후 김책 허형식 이복림 이계동 리추악 장복림 반흥원등 주하( 현 상지시)를 거처간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중국혁명에 마멸할 수 없는 역사를 남겼다.

상지시 하동마을 대성촌. 조선족들이 거대한 터전을 개간하여 상지시에서 가장 큰 농장을 만든곳이다.

상지시 하동마을 하동 조선족 향 대성촌 이규철 촌장의 현 조선족 생활 실태등 이야기를 듣고 하동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규철 촌장의 말에 따르면 대성촌 조선족 생태민속마을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할 사업을 추진중이라고 했다.

상지시에서 나와 목단강시로 향하는 G10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중 찍은 하얼빈시(哈尔滨市)와 무단장시(牡丹江市)를 연결하는 고속철도350억위안(6조1천894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어 2019년 완공된 노선이다. 기존의 5시간 걸리던 운행시간이 90분으로 대폭 단축시켰다. 

이번 답사 기행중 여러곳에서 본 중국 동부지방에 건설된 여러 노선의 육해 신 실크로드로는 다시금 중국의 저력을 엿보게 한다.

이번 만주 답사팀 일행이 묵단강시 철령하를 찾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왕산의 사촌형님 범산 허형이 철령하에 살았다는 기록을 찾고 싶어서다. 

범산은 이육사 시인의 외할아버지로 이육사는 외가쪽 투사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학계는 평가한다. 

범산 허형은 왕산 허위의 12살 많은 종형이다. 범산은 을사오적 중 군부대신 이근택의 처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범산의 장자 허민은 융희2년 일본 순사 와따나베가 작성한 심문조서 일부를 따르면 내란범 허위의 친척이며 등등 내용이 있으며 허민은 당시 군부주사로 근무하내각 지제교를 역임하였는데, 명필로 이름이 나서 고종의 어명으로 명정전(明政殿)과 명정문(明政門)의 현판을 썼다. 

범산의 손녀 허은여사는 백부 허민이 일본의 간계에 의해 갑자기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융희2년 일본 순사 와따나베가 작성한 범산의 장자 허민에 대한 심문조서

아정 허민의 사진 (사진/ 일창 허발의 손자 허벽 제공)

범산의 장자 아정 허민이 쓴 창경궁 명정전 현판

이육사 시인이 큰 외삼촌 일창 허발에게 만주에서 일창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군자금을 모아 준 큰 외삼촌에게 고마움을 담아 보낸 수부선행 휘호

평리원 재판장 서리(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국무총리)등 최고위직 관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13도 의병 창의군을 만들어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한 경북 구미출신의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왕산 허위 의병대장이 1908년 5월 체포되어 10월 순국하자 허위 일가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성산 허겸은 1912년 허위의 가족인 제수와 네 아들 및 두 딸을 데리고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하였다. 허형도 1915년 아들 허발과 허규, 그리고 동생 허필의 가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이미 서간도 통화현에 정착하고 있던 종제 허겸 및 허위의 가족과 합류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직후 허형은 아우인 허필의 가족을 비롯해서 종질인 허학과 허국 등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현 상지시)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허형의 가족들은 철령하로, 허필 일족은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를 거쳐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1929년 봄에는 하얼빈 부근의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하였다. 
범산 허형은 1915년 72세의 나이로 고향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나 만주로 망명간지 7년만인 1922년 10월 3일 7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범산 허형의 묘소는 만주 목단강 사도구 자전산에 있다는데 현재로서는 찾을 방법이 막막하다.


경신참변으로 일제의 탄압과 압박이 거세지면서 가족의 생사가 위태롭게 되자 시산 허필은 삼원포를 떠나 마차를 타기도 하고 기차를 타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랴오닝성 개원현 이가태자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도 중국인 지주들의 횡포 또한 극심해서 마침내 구미 임은리에서 함께 만주로 떠난 마서방네 삼옥이가 중국인 지주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허형식은 그 원수를 갚느라 악질 중국인 지주를 죽을만큼 두둘겨 팼다. 그 내용을 들은 시산 허필은 약제함에 있는 비상금을 몽땅 꺼내 주면서 철령하에 있는 큰집으로 보냈다.

허형식은 이가태자에서 철령하까지 천리가 넘는길을 도보로 마차로 기차를 타고 물어물어 철령하 정거장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는 큰집 허발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곳에서 허발의 도움으로 조선인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범산 허형은 사촌동생 허위 의병대장의 순국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랑하는 큰 아들 허민도 잃고 72세의 나이로 임은허씨 일가를 데리고 성산 허겸을 따라 만주로 망명길에 나섰다.

왕산가 범산가에는 14명의 독립운동가가 있고 큰형 방산 허훈은 당시 토지 3,000 마지기(약 60만평)를 팔아 왕산과 성산의 의병창의 군자금으로 내 놓는등 외손 이육사를 비롯해 사위 이기영등 왕산의 직계 제자인 대한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일가 전체가 독립투쟁에 나선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항일가문인데도 아직 제대로 조명을 받지못하고 있다.

특히 범산가는 남북통일이 되기전에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도 하지말라는 유언에 따라 이제껏 독립유공자 명단에도 빠져 있는 상태며 지난해 범산의 손녀이자 안동 임청각의 3대 종부 허은 여사가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다행히 민문연 구미지회 장기태 서훈추진위원장이 후손들을 설득하여 일창 허발 애국지사의 서훈신청을 한 상태며 입법의원을 지낸 일헌 허규의 서훈 신청도 그 후손이 진행중인걸로 알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야 할 선조들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이제는 더 이상 묻혀있어서는 안된다.

허형식 장군 유적지 답사팀이 철령하를 찾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목단강시로 빠지는 톨게이트를 지나면 철령하가 바로 나온다. 철령하는 일제하 왕산 허위 일가 등 경북 이주민들의 정착촌이다. 범산 허형이 철령하 기차역 인근 버스 정류장 부근에 살았다는 희미한 기록만 가지고 철령하 거리를 끝과 끝을 몇번이나 오가면서 그 흔적을 찾았으나 100년이 다 지난 세월에 그 무엇도 알아볼 수 없었다.

다시 버스를 돌려 도로 반대편 끝쪽을 향해오니 철령하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이 표지판 맞은편에 독립투사들을 수감하여 고문한 액하감옥이 있다. (사진/ⓒ전병택)


목단강시 철령하 액하감옥은 1942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식민지 내 항일세력을 제거하는데 주력을 했다. 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대종교인 25명을 1차 2차에 걸처 3개월간 고문과 악형으로 독립투사를 심문한곳이 바로 철령하 액하감옥이다. 그중 안희제와 나철의 두 아들인 나정련(羅正練), 나정문(羅正紋), 권상익(權相益), 이정(李楨) 등 10명이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철령하 표지판 맞은편에 있는 액하감옥으로 가는 길이다. 

액하감옥 외부 모습 (현재는 철령하 감옥)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1932년 일본군이 만든 철령하 감옥. 항일연군 전사들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고문과 악독한 감옥살이를 한 곳이다. 중국 목단강지역 독립운동유지 보존회는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린 액하감옥을 보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전병택)


<항일팔녀투강 조각상>1938년 10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굴하지 않고 우스훈하에 뛰어들어 장렬히 최후를 마친 조선인 안순복, 이봉선 등 8명의 여성전사를 기념하는 대형 조각상이 광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목단강 시는 인구는 약 300만이 넘는 대도시로 흑룡강성에서 하얼빈과 치치하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8녀투강 조각상 앞에서 추모


1938년 봄 일본 관동군은 송화강 하류에서 '3강대토벌'을 감행한 그해 10월 유격부대는 목단강 하류에서 숙영을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8명의 여전사는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강변쪽에 남아 일본군을 유인했다. 이들 덕분에 본대는 무사히 빠져 나갔으나 8명의 여전사는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사진/ 윤정우)

1,000여명의 일본군.만주군과 싸우다 탄약이 떨어지자 일본군에 잡히느니 차디찬 우스운하로 투신하여 전사를 택한 8녀투강의 주인공 중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 이봉선, 안순복이 조선인으로 중국에서 항일영웅열사에 포함되었다.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은 2명의 조각상이 조선인 이봉선,안순복을 상징한다. 한복 저고리를 입고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이제다시 연변으로 향하는 G11 고속도로를 달린다. 도중에 통화시까지 360km 둔화시(敦化市)45km 이정표가 나온다. 둔화시에서 다시 G12 고속도로 방향을 틀어 연변으로 간다. 연변까지는 대략 450km 가 넘는 길을 가야한다.


둔화시는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현급시이다. 면적은 11,957km², 인구는 48만 명으로 이 중 한민족은 4% 정도에 불과하다. 발해 초기 수도였던 동모산이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목단강시와 둔화 중간 험준한 산악지대를 지나 가는 도중에 만난 징푸호(镜泊湖) 석양 Jiaobo"는 "거울처럼 맑음"을 의미하며 역사상 "숨겨진 바다"와 같은 이름이 있다 한다. 징푸호/ S자형의 둘레 길이 45㎞의 호수 최대 수심 / 48 미터 평균 수심 / 12.9 미터


둔화시 <인구 48만명> 들어가기전 징푸호(镜泊湖)를 지나 휴게소에 잠시 들렀을 때 광활한 만주의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일행들은 좀처럼 보기힘든 만주의 노을을 각자의 마음속에 담았다. 



연변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하기는 너무 먼 길이라 안도현<안투현 安图县> 에 잠시 내려 순이식당을 찾아 랭면으로 한끼 해결. 순이식당 주인은 서울에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안도현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안도현 인구는 21만여 명이고 전체 인구 중 한민족 비율은 25%이라 하니 도심에 들어서자 마자 줄줄이 한글 간판이다. 


밤 10 넘어 연변 도착 상지시에서 묵단강 안도현을 거치는 기나 긴 여정 끝에 숙소에 짐 풀고 바로 잠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