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출신 의병장 방산 허훈 <국역 방산전집> 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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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구미 출신 의병장 방산 허훈 <국역 방산전집> 을 읽다

경북 구미출신의 13도 창의군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 의병장은 고종황제 당시 평리원 수반판사,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국무총리급)을 지냈으며 관직을 버리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포문을 연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을 장식한 인물이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안중근 의사와 직계제자 대한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에게 전승되었다.


왕산 허위의 큰형 방산 허훈(1836~1907)은 당시 땅 3,000 마지기<약 60만평, 현시가 수백억대>를 팔아 동생 성산 허겸과 왕산 허위의 의병 창의 군자금으로 보태고 자신도 직접 진보 의병장으로 참전했었다.



방산 허훈은 畿湖南人의 맥을 잇는 性齋 허전(許傳)의 제자로 주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1908년에 방산의 둘째 허용(許墉)이 노상직(盧相稷)에게 감정(勘定)을 부탁하여수언30권을 22권으로 편차한 다음 문집 이름을 방산선생문집 <舫山先生文集>이라 하고 1909년에 嶺南의 선비들과 친족들의 협조를 받아 문집을 판각(板刻)한 다음 판각을 청송 진보의 남덕정(覽德亭)에 보관하였다.

다음 해 1910目錄 1권과 附錄 1권을 추가로 판각하고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묘갈명(墓碣銘) 첨부하여 2412책의 문집을 남덕정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다. 1983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국역방산전집 (國譯舫山全集)이 간행되었다.

국역 방산전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왕산기념관 소장)

저자 방산은 1867년 자신의 시문을 모아修言30권을 편차하였는데, ‘수언은 주역 (周易) 의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1907년 저자의 장례를 마친 뒤에 1909년 영남일대의 사림들이 합력으로 24권 12책으로 남덕정(覽德亭) 장판이 간행되었다. 

1974년 대구에서 증손인 허흡에 의해 영인 양장본 1책으로 세상에 널리 반포(布)되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한문으로 된 어려운 원문들을 모두 국역으로 쉽게 풀어 편찬하게 되었다. 

<간행사는 당시 성균대학교 총장 조좌호 썼다. 이상 방산전집에서 옮겨 적음>

국역 방산전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왕산기념관 소장) 

방산전집을 살펴 읽어보면 아들 용과 병 그리고 손자 순을 데리고 금오산을 오르면서 채미정 해운사 약사암등에 관해 남긴 글들과 금강산 유람, 경포대, 합천 해인사, 여주 신륵사, 속리산 법주사, 팔공산 동화사, 주왕산, 부산 다대포 몰운대 범어사 미륵암 그리고 논산의 관촉사, 강경, 계룡산, 밀양 영남루, 서울 송파, 청량산등 전국을 주유하면서 수백편의 시와 글을 남겼다. 

방산의 글 일부를 옮겨 적으며 당시 선비들의 삶의 한 단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해인사

높고 울창한 가야산 쌓인 기운 웅장하다. 연기와 구름이 법왕궁 깊이 감갔네. 창.깃발.대야.질고리 같은 바위의 형상 괴이하고, 종소리.경쇠..거문고..피리 소리같은 냇물소리로구나. 천년세월에 문창후의 발자취는 아득히 멀고, 당년에 희랑스님은 처음으로 절을 세웠다네 간직한 팔만대장경판 장차 무엇에 쓰려는가. 불가에서는 만법이 다만 공()이라네

금오산 약사암

이 외로운 암자가 있어서 이 산이 이름난다네, 살고 있는 중은 손 맞이하느라고 전혀 한가하지는 않구나.  목탁 흔드는 소리는 벼랑이 화답하듯 반향하고 절벽에 사는 매는 힘차게 날고 구름과 함께 돌아온다. 

어느 곳 강빛이 나무가지 끝에 나타나는가, 오랜 시간을 부처의 기운이 바위 사이에서 나오네. 아득히 멀리 굽어보니 인간세상이 작다. 나막신 신들매고 검각관을 가는것 같구나 

양양 낙산사

난간을 비껴 서서 온갖 형상을 다 보게 되니 관동에서 이 절이 첫째라고 할만하다. 전당에는 상서로운 구름 숲과 함께 합처져 있고 바다에는 아침 해가 파도를 헤치고 떠오르네 보이는 듯한 삼신산은 어디에 있는지 아홉 고을 성곽도 여기서는 까마득한데 양쪽 겨드랑에 시원한 바람 나는듯하니 이 흰 머리로 구경하려는 뜻 저 버리지 않았구나 

이외에도 금강산 기행을 하면서 비로봉 만폭동 보덕굴 백운대 마하연 장안사 신계사 해금강등에 관해 수십편의 시를 남겼다. 

그리고 아우 허겸과 허위에게 보낸 편지 글 일부를 옮겨 적는다.

아우 허겸에게 --- 군이 한번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 견딜 수 없다. 

근황이 어떠한가? 집안이 모두 평온하고 계협의 안신은 근간에 들었는지? 나는 고제옹유집의 편집을 위하여 어제 부포에 내도해서 지금 원촌으로 향해가네 그러나 초열흘적에 마땅히 우소로 돌아갈 것이네 - 정유년

아우 허위에게 보낸 편지

전번에 구금을 당하였다가 이제 기어이 벗어나서 가족을 이끌고 돌아왔다하니 기쁜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그러나 군이 지협에 들어왔을 때 어째서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나는 70의 고령에 이르러 거칠은 빈 한 구석에 살면서 범백사를 한가지도 군을 믿지 않는 것이 없네. 그런데 3백리의 먼 길이 가로 막혔으니 내 장차 누구를 믿고 살겠는가. 

비록 태평한 세상에 있을지라도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지금의 이 때가 어느 때라고 낙락히 분리되어 질병이 있어도 함께 하지 못함이라 이곳은 땅이 메마르고 백성들은 가난하여 살아가는 도리가 매우 어려우나 산밖의 성진이 이목에 도달하는 일이 드물고 풍속이 또 질소검박하여서 자손을 위하여 깊이 멀리 생각하는 자는 진실로 마땅히 저곳을 버리고 이 곳을 취할 것이니 다시 깊이 생각하게 - 을사년 (1905년) 이해에 경부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사촌 동생 허필에게 보낸 편지

일전에 인편에 두어 글자 적어 부쳤는데 과연 보았는지 이 해가 장차 저물려는 때에 상상컨데 미칠 수 없는 애통과 외롭게 된 회포를 억누를 수 없으시겠네 치화와 한경은 다 어떻게 지내는가? 그리고 대형이 거창의 산협으로 옮겨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 부포의 우절을 근간에는 듣지 못하였네 그래서 일간에 하인을 보내서 문후하려고 하네. - 갑오년

조카 일창 허발에게 보낸 편지

신년이 되니 그리운 생각 더욱 깊어지네 중성리 복 많이 받으셨는가? 노인은 먼길을 다녀온 피로가 해를 넘겨도 떨치지 못하며, 우거의 음신도 오랫동안 막혀서 답답하네.

보사는 이미 종숙과 상의하였는데 봄 사이에 개보하는 것이 좋을듯 다시 통기하겠네. 바야흐르 곳을 오산의 동쪽 기슭에 복정하되 임은에서 5리 미만인 거리에 하려고하니 이 일이 뜻대로 된다면 군의 무리와 상종하기가 진주의 우거보다 어찌 훨씬 쉽지 않겠는가. - 갑오년

아들 허병에게 보낸 편지

세초에 편지가 있은 뒤로는 소식이 막혔으니 답답함을 견딜 수 없다. 근상이 연은한지 알 수 없구나 너의 숙부도 편안하냐? 어째서 지리하게 나그네 노릇을 하면서 돌아올 줄 모르는지. 나는 기력이 지난 겨울에 비교하여 또 감손되었다. 

일전에는 도산서원에 가서 향례를 거행하였다. 또 병산서원의 소임도 맡게 되었다.비록 사퇴하려 해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한번 가지 않을 수 없음에 일일이 괴롭구나 -정미년

방산 허훈은 1907년 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 해 8월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주의 거유 한주 이진상등 수십명의 유학자들과 교류했던 서찰과 시서등 900페이지 넘는 책속에 담겨져 있다. 서찰 내용을 읽어보면 방산 허훈이 참으로 다정다감하기도 하며 선비로서 격조높은 문장으로 당시 시대 상황을 전하는 내용들을 살펴 알 수 있다.

방산 허훈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북 선산(善山) 사람이다.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맏형이다. 1895년 아우 허위가 거의(擧義)할 때 토지 3천여 두락(斗落)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에는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방산 허훈의 장자 허숙의 아들 허종은 성산 허겸을 따라 신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허종의 아들이 제4대 민선 대구시장(1954.10.5~1958.10.4)을 지낸 허흡이다. 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는 허소는 허흡 시장의 손자다.

아직 미서훈 상태로 남아 있는 왕산가 독립 유공자들의 서훈 신청을 위해 자료를 찾아 다니다가 만남의 자리를 가지게되었다. 

좌로부터 전병택 민문연 구미지회장, 장기태 위원장, 박진관 영남일보 미디어 부장, 방산의 직계 후손인 허소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 행정관 (사진 ⓒ김성대)

방산 허훈이 청송 남덕정에 쓴 에는

<가진거라곤 시서 천권언제나 우리 형제 같이 앉을 꼬라고 썼다

특히 그는 청송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서울에서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비서원승 (국무총리)로 활약하는 

아우 왕산 허위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을 잊지않으면서도

<진심갈력하여 나라의 위국을 건져야한다>고 근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방산이 주역 수사기성(修辭立其誠)에서 가져온 수언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 말이 타락한 요즘 정치권 인사들의 발언은 스스로 그들의 말을 쓰레기 통으로 던져넣는것과 같다. 그들의 정신도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으로 넣는 행위다. 사람의 권위는 말의 품격에 있다. <修言> 즉 말을 닦고 고른다는 것이다.  

물 한 모금 마시려해도 좋은 물을 골라 마시는 세상에 하물며 말씀을 고르는 일이야 얼마나 고르고 골라야 할까? 수사(修辭)를 해야 말 다운 참말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입기성(立其誠) 아니겠는가?

방산선생 문집의 글귀는 그야말로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의 결정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