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서 성주까지 왕산 허위와 심산 김창숙 독립운동가 역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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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구미에서 성주까지 왕산 허위와 심산 김창숙 독립운동가 역사 탐방

독립투쟁의 횃불 경북 구미 성주의 독립운동가 역사탐방

구미 참여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이 구미와 성주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 연대하여 그 흔적을 찾아 나섰다. 

왕산허위 생가터에서 왕산기념관 그리고 왕산 순국 후 성산 허겸이 구미 임은동의 남은 허씨일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간 부상역의 흔적이 있는 부상 터널을 잠시 들르고 성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러 초전면 대가면 월항면으로 그리고 수륜면으로 하루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왕산 허위 의병 총대장 생가터에 조성되어있는 왕산기념공원. 이곳 생가터도 왕산 순국 이후 남은 왕산의 유족등 일가 전체가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만주로 망명을 떠나면서 남의 손에 넘어간것을 허경성씨등 친손자 3분이 6억원 대출을 받아 구미시에 기증하여 기념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임은허씨 일족들이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구미를 떠나 만주로 떠난 이후 왕산 허위 생가와 그 허씨일족들의 터전은 방치되어 몰래 야금야금 남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생가는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만다. 위 사진은 2,000년도 고물집하장으로 때론 텃밭으로 사용되고 있던 장면을 실록소설<허형식장군>의 저자 박도 선생이 촬영한것이다.

어슬프게 조성되었고 관리상태도 부실하여 곳곳에 조명이 고장나 밤에는 우범지역 같은 상태다. 예전에 못된자들이 몰래 동상을 훔처가려다가 발각된 적도 있었다. 신문식 구미시의원이 생가터 복원과 일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것을 시의회 5분 발언을 통해 요구하기도했다.(사진/ⓒ이동석)

이번 답사는 구미 참여연대가 주최하고 구미 민문연 회원들이 동참하여 구미 임은동 왕산 허위 의병장 생가터에서 시작하여 성주에서 몇분이 합류했다. 임은동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앞 (사진/ⓒ이동석)

이번 역사 답사에 앞서 소개하자면 구미 왕산 허위와 성주의 심산 김창숙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중의 별이다.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현재(2019년 03월)까지 전체 독립유공자는 15,511명 인데 훈격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그리고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이 있는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1등급의 최고 훈장으로 총 30명이 서훈을 받았으며 중국인 장제스 총통, 송메이링, 쑨원등 5명을 빼면 한국인은 25명이다. 그중 경북 출신 대한민국장 서훈은 문경의 이강년 의병장, 성주의 심산 김창숙 선생, 구미의 왕산 허위 의병 총대장 3명이다. 

그래서 이날 왕산에서 심산까지 찾아가는 역사탐방은 3.1 혁명 100주년을 맞아 더욱 더 의미가 크다.

왕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사진/ⓒ전병택)

(사진/장호철 선생 블로그)

13도 창의군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상에서 단체사진 (사진/ⓒ이동석)

석주 이상룡 가문,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왕산 허위 가문은 대한민국 3대 항일가문으로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왕산 허위가문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최고 명문가로 손꼽히지만 역사에 묻혀있는 상태다. 왕산 허위 가문에서 독립유공자는 총 14명 넘는다. 대한민국 임청각 3대 종부 허은 여사는 지난해에 애족장 서훈 받았으며 허형식 장군은 아직 서훈조차 못받고 있다.

'광야'를 쓴 민족시인 이육사(이원록)은 왕산 허위 선생의 사촌 허형의 딸인 허길의 아들이다. 이육사의 외갓집이 바로 경북 구미며 그의 외삼촌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특히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운반책이었던 허규(許珪)가 이육사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컸으며 또 다른 외삼촌인 허은의 아버지 일창 허발도 이육사에게 항일 역사의식을 많이 키쳤다고 한다. 

이육사의 외사촌 허은(許銀)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李相龍)의 손자 며느리가 되어 석주 이상룡 집안과 왕산가는 겹 사돈이 되었다.

이육사가 쓴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허형식을 흠모하며 썼던 '시'다.

왕산 허위 선생의 묘소 앞에서 부상리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옮겨 온 이야기. 왕산 허위의 직계 제자로 왕산의 순국 후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버리고 독립투사가 되어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무장독립투쟁을 한 고헌 박상진 의사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이동석)

박상진 의사는 김좌진 장군과 의형제를 맺어 그를 아우라 부르며 총애하여 나중 그에게 현시가 10억원 상당의 군자금을 주어 만주의 광복회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의장은 사회지도층의 지지를 얻고 자신의 친일행적을 씻기위해 당시 국민들에게 숭앙받고 있는 독립투사와 그 유가족들을 찾아 다니는 일에 분주했다. 1962년 10월 24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왕산 허위 선생 순국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기념촬영을 한 사진. 옆의 한복입은 두분은 왕산 허위 선생의 딸과 며느리로 대구에 살고 있는 친손자 허경성의 어머니다. (사진/인터넷 캡처)

100년전에는 경부선 기차길이 현 구미역 노선이 아니라 금오산 뒤쪽 김천 -부상리-약목-왜관을 가는 직통으로 뚫렸다. 1015년 왕산 순국 후 남은 임은허씨 일족들은 일제의 학정을 피해 야밤에 임은동을 떠나 오태 북삼을 거처 김천 남면 부상역을 통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다. (사진/ⓒ이동석)

구미를 떠나 김천 남면 부상리의 기차길 터널을 답사하고 성주 초전으로 들어와 백세각 항일의적비 먼저 찾는다. 백세각 항일의적비 앞에서 단체 사진 (사진/ⓒ이동석)

성주의 야성송씨 문중을 이끈 송준필이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한 백세각(百世閣) (사진/ⓒ이동석)

백세각은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었으며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어 만든 건물로 유명하며 좀처럼 보기 힘든 ‘구(口)’자형으로 건축된 건축물이다. (사진/ⓒ이동석)

3.1운동이 일어나자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운동]를 추진하였다. 

성주군 초전면 고산마을의 야성송씨 문중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에 앞장선 사람이 송준필이다.
1919년 3월 초순 송준필은 야성송씨 충숙공파의 종가인 백세각(百世閣)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시국 상황을 논의하였다. 

이어 김창숙과 만나 파리장서 계획을 협의하고 성주지역 서명자 규합에 나섰다. 송준필은 통고국내문을 작성하여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스승 이승희 유학자의 생가를 찾아서 성산(星山) 이씨의 세거지인 월항면 대산 1동에 있는 한개마을에 도착.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박탈당한 시국에 분노한 심산 김창숙은 스승인 한계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상소.한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심산 선생은 이 일로 8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된다. 이후 선생은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든다. (사진/ⓒ이동석)

심산 김창숙 선생의 스승 이승희 유학자 생가를 찾아 (사진/ⓒ전병택)

이승희 아버지 성리학자 이진상이 중수한 한주정사(寒洲精舍)는 일제강점기 이승희를 비롯하여 여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유서깊은 저택이다. 한주 이진상이 문인들과 성리학을 강학하던 정사로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齎) 현판이 붙어있다. (사진/ⓒ이동석)

심산의 스승 이승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성주의 국채보상단연회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했다. 같은 해 강압에 의해 고종이 퇴위하자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세계 여론에 양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한계 이승희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개척자라고도 불리운다.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발상지인 북비고택(北扉故宅·2013년 성주 응와종택(凝窩宗宅)으로 개칭 (사진/ 이금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명천서원 (사진/ ⓒ이동석)

다시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로 돌아와 청천서원을 둘러보고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다.(사진/이동석)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들 후손들은 어딜가나 고달픈 삶을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구미 왕산가 뿐만 아니라 성주의 심산 후손들도 고달픈 삶을 살고있다고 이곳을 지키는 집안의 후손이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이동석)

심산은 명문가의 안락한 삶을 스스로 저버리고 항일투사로 나서 일평생을 기구하게 살다간 '지조파 선비'다. 도영주 치과병원장이 심산의 삶을 조명하면서 심산은 독립운동에서부터 해방 후 반독재 투쟁을 이어간 민주주의의 표상이라 일컬으며 안동의 그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있지만 "심산처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어간 독립투사가 있는가?"라며 목청을 높이기도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 생가앞에서 (사진/이금희)

일제의 극악한 고문으로 인해 두 다리가 마비되는 앉은벵이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승만 반독재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으며 전국 유림(儒林)을 재조직하고 성균관 대학을 설립한고 성균관대 초대 총장도 지냈다. 이후 학교에서 물러난 후에는 집 한 칸 없는 궁핍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럴 즈음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사회 지도층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직접 병문안을 왔다. 최고권력자가 찾아왔으니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일어나는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심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박정희를 외면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도 친일파에 의해 심산은 고통받았다. 고향 성주 대가면 생가에도 제자등 수많은 인사들이 심산을 찾아왔으나 이승만은 골목 어귀에 감시 경찰을 배치해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200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심산상 수상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기일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심산은 그 정도로 존경받는 분이었다.

그러나 성균관 대학이 삼성으로 넘어가면서 심산상이 한때 중단되었다.

수륜중학교 전경 

마지막으로 들른 송진환 교장의 수륜중학교...작은 시골 중학교이지만 심산과 안중근 김구등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곳곳에 새겨놓은 전인교육의 산실같았다. (사진/ⓒ전병택)

박정희가 제대로된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왕산 생가터 인근은 구미공단 개발 당시부터 그 일대가 성역화 되었을것이며 성주 대가면 칠봉리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도 지금처럼 초라하게 남아있지 않았을것이다. 

항일 의병장, 독립투사들이 부각되면 될수록 그의 창씨개명과 일왕에 혈서를 쓰고 충성맹세한 그의 친일행적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의손으로 넘어간 왕산의 생가터를 친손자들이 은행 대출을 받아 다시 구입하여 구미시에 기증할 무렵 당시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무릎꿇어 왕산 선생에게 사죄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겨우 기념관 하나 만들고 나서는 잊어버리고 관심도 두지않았다.

구미와 성주등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답사여행이 활발히 전개되고 시.군에서도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선조들의 나라사랑정신을 제대로 가르치는 역사 교육 체험 현장으로 이끄는 방안이 만들이지길 기대하면서 답사여행의 소회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