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의 제자 고헌 박상진과 의열단 약산 김원봉 그리고 장택상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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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산 허위의 제자 고헌 박상진과 의열단 약산 김원봉 그리고 장택상 박정희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에서 신문식 구미시의원, 장기태 민주당 전 구미을 지구당 위원장,  민문연 구미지회장과 그리고 박찬문 위원 4명이 약산 김원봉 여동생 밀양 김학봉 여사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밀양 출신 약산 김원봉과 구미(칠곡) 출신 장택상의 악연 그리고 친일 악질 경찰 노덕술과 박정희의 악행에 대해 간략히 적어봅니다.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까지 한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張承遠)은 경북 왜관에서 대구를 갈려면 장승원의 땅을 밟지 않으면 못 간다고 할 만큼 한강 이남 최고 부호였으며 대구 계산동 99칸 한옥에 살았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려고 벼슬을 매관매직하던 시절 관찰사는 얼마, 지방수령은 얼마 하고 정가가 매겨지던 때였다.

 

장승원이 1904년 당시 의정부(議政府) 참찬직에 있었던 왕산 허위(許蔿)선생에게 20만 냥(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50억 원)의 거금을 싸 가지고 찾아가 경상도 관찰사를 시켜달라고 연을 댄적이 있었다.

 

당시 왕산 허위의 제자였던 박상진은 "스승님, 조선은 이제 곧 망합니다. 다시 나라를 되찾으려면 군대와 인재를 육성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일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 돈을 받지 마시고, 후일 나라가 망한 뒤 독립자금이 필요할 때 그에게 받기로 단단히 약조하시고, 그의 청을 못이긴 척 들어주십시오제가 보기에는 장승원이란 자가 저 돈가방으로 누구를 구워 삶건 틀림없이 벼슬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라고 진언을 했고 이후 허위 선생은 장승원과 독대한다.



※ 참고 

[대한민국 5대 항일 가문으로 경북 구미 출신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이 손꼽힌다.그중 가장 잊혀진 가문이 3대에 걸처 독립운동한 구미의 왕산 허위 가문으로 허위 의병총대장의 생가조차 복원되지 않은 상태며 가문의 14명의 독립 유공자가 있으나 역사적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은 구미에 그 흔한 묘비하나 없으며 생가터는 흔적도 없다]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작전 군자금 지원도 거부한 장승원



이후 이 소식을 들은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은 친일 부호 매국노 장승원 처단 결정을 한다.



의형제를 맺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김좌진



왕산 허위의 직계 제자로 대한제국 최초의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고사하고 무장 독립 투사가 된 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35)과 의기투합한 김좌진(30)은 의형제를 맺는다. 


또한 이무렵 박상진을 흠모한 21살 청년 김원봉은 장차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고관대작과 친일파를 처단하여 광복회 강령을 계승한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김좌진을 아우라 부르고 총애하게 된다. 나중 김좌진을 만주 광복회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군자금 현시가 10억을 주며 만주로 파견한다. 




대한 광복회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지시를 받은 채기중, 강순필, 강찬순, 임봉주등 4인의 광복군이 권총을 휴대하고 1917년 11월 10일 장승원의 집에 잠입하여 그의 아들 3인(장길상,장직상,장택상)이 보는 앞에서 장승원을 민족을 위해 죽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죄악을 자식들에게 자세히 알려주고 훗날 조국이 해방이 되어도독립군에게 나쁜 감정을 갖지 않도록 고지를 한 후에 장승원을 사살했다.

 

장택상은 이후부터 독립운동을 하는 놈들은 나의 아버지를 죽인 철전지 원수이니 

아버지의 원수를 갑기 위해 모두 죽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았다고 한다.

 

해방 후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선생을 용산 철도노조 파업의 주모자라고 잡아오라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에게 지시하여 김원봉 선생에게 뺨을 때리는 등 모욕을 주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 김원봉은 장택상 과 노덕술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난 후 사흘을 밤낮으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월북을 하게 된다.

 

그의 월북 이후 남한에 남아있던 그의 9남 2녀의 형제 가운데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5명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 죽어 갔던 것이다. 

 

약산의 형제 중 생존자였던 김봉철씨는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유로5.16 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선고문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직접 서명을 했다.

 

그것이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에게 해방된 조국이 베푼 일이었다.






약산 김원봉의 11남매 가운데 막내이자 유일한 혈육이었던 김학봉 여사의 부고 소식에도 주요 언론은 다루지 않고 있다.